여수지역사회연구소



승승장구했던 여수의 근현대사 장면들 (1부)군사기지서 식민어촌 전락 … 일본인 이주 늘며 도시화
관재수  2013-01-23 21:49:57, 조회 : 3,437, 추천 : 357

군사기지서 식민어촌 전락 … 일본인 이주 늘며 도시화
17. 1897년 여수군의 시작
日 본토와 연결 쉽고 농수산 자원 풍부해 매력
한일병합 후 일본인 진출 … 1918년 31% 점유
1930년 광여선 개통후 인구 집중 근대화 기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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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09일(수) 00:00

*전라좌수영 성문과 성곽 위치(추정)와 각 성문의 현재 모습. 군사적 요충지였던 여수에는 1479년 행정기관 대신 군영(전라좌수영)이 설치됐으며, 1895년 전라좌수영의 폐지와 함께 순천의 일개 면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2년 뒤 여수군으로 독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림있음)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는 행정기관이 아닌 군영, 즉 전라좌수영이 설치됐다. 1479년(성종 10년) 처음 설치된 이후 416년간 존속되다가 열강의 아귀다툼이 한창이던 1895년(고종 32년)에 폐지됐는데, 그러면서 여수는 한낱 면이 돼 순천에 귀속됐다.

조선 후기 기록 및 고지도에 의하면 전라좌수영 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 광주, 목포, 순천과 마찬가지로 이 전라좌수영의 성곽은 일제에 의해 1910년을 전후로 점차 헐리기 시작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1915년 만들어진 지적원도에는 동정(현 동문동) 지역의 성곽은 남측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지되고 있으나, 서정(현 충무동) 지역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 남아있다. 좌수영에는 서문(통의문), 동문(총인문), 남문(진남문) 등 3개의 성문이 있었다. 서문은 교동의 골목길 속에, 남문은 진남관 바로 앞의 대로에 서 있었고, 동문이 있던 자리는 인근 상점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선박이 정박했던 포구는 중앙동 로터리 인근에 있었으나 매립돼 이순신 광장으로 조성됐다. 진남관은 충무공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자리에 1599년 당시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다. 이곳에 1911년 여수공립보통학교(여수서초교)가 개교한 뒤 1935년 이전하기도 했고 해방 이후 1946년엔 여수중학교와 여수야간중학원의 교사로 쓰이기도 했다.

2년간 순천에 속해있던 여수면은 1897년 5월16일 칙령 제21호로 여수군이 됐다. 이 칙령 제21호의 내용을 보면 제1조 “전라남도 구역 내의 전 좌수영에 여수군 군청을 설치하고 순천의 율촌·여수·삼일·소라 등 4개 면으로 해당 군 구역을 획정한다”고 적고, 제2조에서 군의 지위를 3등군으로 규정했다. 당시 조선은 전국 339개 군을 5등급으로 나눠 관리했는데, 예를 들어 광주군, 나주군, 순천군 등은 1등군, 보성군, 해남군 등은 2등군이었다.

1910년 발간된 한국수산지 제3권에 따르면 당시 여수군은 군 승격 이후 구산면 등 3개 면을 더 늘려 7개 면 1만2677명으로 규모가 늘었고, 1913년 12월29일에 행정구역 개편에 해당되는 부군폐합으로 돌산군이 여수와 고흥으로 분리 흡수되면서 두남·남·화개·옥정·삼산 등 5개 면이 더해져 12개 면으로 성장했다. 그 이듬해인 1914년 면 폐합으로, 현내면과 쌍봉면 일부가 여수면이, 구산면 일부와 덕안면 일부가 소라면, 화개면과 옥정면이 통합돼 화정면이 되면서 여수군은 10개 면 97개 리가 됐다.


*1913년 발간된 ‘보고의 전남’에 실린 여수 진남관 사진. 이 진남관은 75칸의 대규모 객사(읍성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자리하며, 왕을 상징하는 전패 등을 모신 관사)로,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개교한 여수고등보통학교 등의 교사로 쓰였다. (그림있음)



폐합 기준에 의하면 면의 면적이 4방리(0.15㎢) 이하인 경우 그 대상이었으나 여수·삼일·율촌·쌍봉면은 호수가 800호 이상이어서 제외됐다. 반면 면적이 좁거나 호수가 적고 재정이 부족한 면은 인접 면에 흡수됐다.

이렇게 조정된 행정구역은 1931년 4월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해 1읍 9면 체계가 되고 1945년 해방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됐다. 여수읍은 1949년 8월15일 부로 승격했고, 같은 날 지방자치법 시행으로 부가 시로 변경됨에 따라 여수시로 명칭을 바꿨고 기존의 여수군은 여천군이 돼 여수시를 제외한 9개 면을 관할했다.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1∼1943)를 근거로 여수의 인구변화를 살펴보자. 여수군의 인구는 1911년 4만1268명이었고, 이 가운데 일본인 수는 385명에 불과했다. 1913년 돌산군 일부가 흡수되면서 1914년 6만7624명으로 급증했고, 이 시기에 일본인 수도 1109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후 여수군 전체의 인구는 1930년과 1942년에만 전년대비 7% 급증했고, 1911년부터 1942년까지 매년 평균 4%의 증가율을 보였다.

여수면(읍)의 인구변화는 이와 달리 대폭 상승하는데, 여수군과 달리 여수면(읍)의 경우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친 자료를 구할 수 없어 통계연보에 수록된 자료 중 ‘주요시가지 호구(1909년∼1925년)’, ‘인구 1만명 이상의 읍면 현주인구 및 세대(1926년∼32년), ‘읍별 호구 및 인구(1933년∼43년)’의 3가지 자료를 인용한다.

여수면도 역시 1913년 면 폐합으로 인해 인구가 14%로 증가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915년, 1918년에 전년대비 10% 이상 급증했다. 일본인 수도 1917년에 이미 1170명으로 당시 여수면의 인구 중 5분의 1이 넘는 23%를 점유했고, 그 다음해인 1918년에 31%에 이른다. 1910년대 거점항구인 목포와 내륙 거점인 광주에 일본인들이 더 몰려들기는 했지만, 인구 비율 측면에서 보면 여수면이 가장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여수에는 19세기 말부터 일본 어선들이 빈번하게 오갔고,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종포와 봉산리 일대에 ‘식민 어촌’이 건설되는 등 일본인들에게 여수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여수는 일본 본토와 신속하게 연결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는 것은 물론 어족자원이 풍부했으며, 전남 동부권의 쌀·면화가 집적되는 등 장점이 있었다. 여수를 통해 목포, 부산, 일본 시모노세키 등의 항로가 속속 들어선 것도 이들 여수 진출 일본인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1929년부터 1931년 사이 여수면(읍)의 인구는 매년 평균 16%의 증가율을 보였는데, 그 핵심 배경에는 1930년 12월 개통된 남조선철도회사의 광주∼여수선이 있었다. 여수역이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철도가 여수까지 연결되면서 인구와 물자의 집중은 한층 가속화됐다. 여수면(읍)은 1930년대 이후 매년 인구가 연평균 7%씩 늘면서 1943년에는 인구가 4만5261명에 이르렀다. 일본인의 수가 1931년에 처음 3000명을 넘어섰지만, 이후 큰 변화가 없었다.

1910년 이전 여수 앞바다에는 일본 어선은 물론 군함까지 등장할 정도로 요충지였다. 1897년 8월23일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의 의정부 보고는 일본 군함 1척과 소함정 4척이 수심 측량차 종포에 정박했으며, 이에 놀란 지역민들이 동요하자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1906년 광주경무소 여수경찰분소와 목포우편소 여수우편취급소 등이 개설되고, 1907년 성냥과 석유, 양악 등이 전래됐으며, 일본 여관과 요리점도 생겼다. 1908년 일본 기선이 입항해 여수∼부산 항로가 개설되고 수산물검사소가 설치됐으며, 의병이 여수 일본인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립 경명학교가 설립되고 순천, 벌교, 남원과의 전화가 개통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09년이다.

한일강제병합이 된 1910년에는 여수∼순천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양 지역의 물자와 사람 이동이 빈번해졌고, 근대적 서민금융기관인 여천금융조합이 들어섰다.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인들의 여수 진입이 본격화됐고, 1911년 공립심상소학교, 일본인재향군인회 등 일본인 관련 시설은 물론 일본인 개발업체인 다카세(高瀨) 여수지점도 진출했다. 이 다카세 여수지점은 향후 기존 여수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는 해안 매립을 주도하게 된다. 앞서 종포와 봉산리 일대에 들어선 ‘식민 어촌’은 1912년 일본 아이치현 어업이민단이 정착하면서 조성됐다.

여수는 나주, 목포, 광주, 순천보다 조금 뒤떨어졌지만, 일본 본토의 어업 관련 인구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일본인 거주 비중이 높아지고, 그것은 곧 도시화와 근대화의 기폭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윤현석기자 chadol@kwangju.co.kr·윤희철 국가기록원 직원

▲도움말 주신 분

노경수 광주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이봉수 동강대 건축과 교수

▲이 기사는 국가기록원·광주시·전라남도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출처:광주일보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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