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역사회연구소



승승장구했던 여수의 근현대사 장면들 (2부)국제항 열리며 인구·화물·자본 집중 … ‘여수 전성시대’
관재수  2013-01-23 21:48:43, 조회 : 3,335, 추천 : 383

국제항 열리며 인구·화물·자본 집중 … ‘여수 전성시대’
18. 수산물의 도시, 신항 만들며 초고속 성장
1912년 일본인 늘자 갯벌 메워 시가지 조성
日 어업 이민단 정착·자본가들 회사 설립
목포∼日 연결 중간기지 항구 중요성 대두
1930년 신항 조성 완료 … 시모노세키간 영업

--------------------------------------------------------------------------------

2013년 01월 16일(수) 00:00


1935년에서 1936년 사이 완성된 오동도 방파제. 일제가 1933년 8월 태풍으로 인해 어렵사리 축조된 여수항이 큰 피해를 입자 1935년 7월 공사비 240만원을 투입해 오동도를 연결하는 700m 방파제 축조공사에 나서고 또 이후 추가로 450m 구간을 연장했다. (그림있음.)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 어민들은 개인적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러일전쟁 전후 특히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제는 자국 어민 이주 정책을 시행했고, 일본 각 부현에서도 매년 예산을 배정해가며 이주를 장려했다. 그 결과 1909년에는 어촌 수가 43곳, 어민 수 4949명, 1912년에는 45곳, 6277명으로 증가했다.

1922년 5월 동아일보 기사에는 히로시마현에서 1918년부터 15개년 계획으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조사구역으로 설정하고 통영과 여수에 100호의 이주 어촌 설치 방침을 수립했고, 이미 일부 건축이 끝나 이주어민이 점차 도항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수산자원 및 여타 조사를 위해 조선총독부에 승인을 받아 실지조사에 들어갔고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 어민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일강제병합 직전 1910년 한국농상공부수산국에서 만든 ‘한국수산지’에는 여수에 관한 기록에서 “아직 일본 출어자의 정주는 없지만, 출어선의 출입이 빈번하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여수에 이주어민의 정착은 공식적으로 없고, 이후 종포와 봉산리에 일제의 ‘식민어촌’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1월6일자 매일신보는 일본인 이주가 급증하고 이들은 갯벌을 매립해 시가지를 조성했다고 적고 있다. 같은 해 수산주식회사가 들어서고 아이치현 어업이민단이 정착했으며, 일본인 자본가들의 회사 설립 출원이나 이들의 간척지 조성 민원도 잇따르고 있다. 1913년에는 여수와 돌산을 잇는 해저전화가 개통되고, 1914년에는 통조림공장, 곡물검사소 등이 여수에 들어섰다.


1958년 여수 서시장 일대. 연이어 서있는 일본식 가옥과 좁은길, 한문 간판 등을 볼 수 있다. (그림있음)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시가지 조성을 위한 매립이 계속됐고, 1917년에는 여수에 공립간이수산학교, 광주지법 여수출장소가 들어섰다. 하지만 여수는 이 해 1897년부터 여수군청으로 쓰이던 운주헌(수군절도사 시무청)이 야근 직원의 실화로 전소하는 불운을 겪는다. 운주헌은 웅대하면서 섬세한 건축미로, 진남관, 진남문과 더불어 여수 3대 건축물로 손꼽혔다.

일제 초기 남해안의 중앙에 위치한 여수시는 근해어업 및 연안 항해 기능만 담당했지만 점차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 그 배경에는 전국 최대의 쌀·면화 생산지인 전남의 유일한 항구인 목포와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중간기지 성격의 항구가 시급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12년 여수는 시가지 조성 등을 위해 연안 해수면 수만평을 매축하는 방안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인가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일 공사에 착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915년 작성된 여수면 동정과 서정의 지적원도에 항만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해볼 때 아마도 1920년대에서야 관련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수항은 1918년 지정항이 되면서 항만에 관한 각종 공사 및 행정상의 처분이 조선총독부의 권한에 속하게 됐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공문서를 살펴보면 1926년 일제는 1200원의 예산을 투입해 한 달간 여수항 측량조사를 실시했다.

공유수면매립에 관한 문서철도 있는데, 주로 1912년부터 1934년에 집중돼 있다. 이 매립사업을 실시한 주체는 총독부나 여수면이 아닌, 다카세 농장 등 일본인 사업체나 개인, 전남수산주식회사, 여수기업주식회사 등과 같은 기업이었다. 매립사업이 그만큼 큰 수익을 남겼다는 말이다.

항만 축조 역시 조선총독부가 아닌 후일 광주∼여수선을 구축하는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맡았다. 이 회사는 1928년 철도 노선 및 기차역 건설과 함께 여수항 수축을 위해 여수 구항에 해당되는 교동과 중앙동 일대 공유수면의 매립 방침을 수립했다. 당시 갯벌과 수심이 얕은 바다였던 이 곳에 여수역, 여수수산물특화시장 등을 설치하겠다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1929년 이 회사는 여수 구항이 좁아 향후 확장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 총독부의 계획 변경인가를 신청하고 곧 승인받았다. 새롭게 거론된 지역은 바로 동정 및 덕충리 일대로, 지금의 여수 신항에 해당된다. 공사비 200만원을 투입, 12만7073㎡를 매립하고, 폭 6m의 방파제 240m의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광주∼여수선의 개통에 따른 수익 창출을 위해 이후 여수 항만공사는 매우 신속하게 추진돼 1930년 7월26일 마무리됐다. 매립에 쓰일 토사는 여수 와우산을 헐어 충당했고 연동, 모정, 덕충 등 27만8000여 평의 논, 갯벌 등을 매립하는, 사실상 신시가지를 구상하고 있다. 이 공사를 끝내면 여수는 목포와 군산을 능가하는 여객화물의 집산항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1933년 8월 태풍으로 인해 어렵사리 축조된 여수항이 큰 피해를 입자 총독부는 1935년 7월 공사비 240만원을 투입해 오동도를 연결하는 700m 방파제 축조공사에 나서고 또 이후 추가로 450m 구간을 연장하는 등 여수항에 대한 투자는 꾸준히 계속됐다. 오늘날 오동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여수 신항의 방파제가 완성된 것이다.

1936년에 출간된 ‘조선항만지사정’은 당시 여수항을 내항(현 구항)과 외항(현 신항)으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다. 내항은 1918년 지정항이 된 곳으로 외항에 인접한 당시 여수의 신시가지를 넘어 돌산도의 북단에 건설된 곳으로 2000t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었다. 외항은 남조선철도회사가 선차(船車) 왕래를 위해 조성한 종단항이었는데, 3000t급 선박의 정박이 가능했고, 부두에는 여수항역 세관검사소, 보세창고, 연락화물용 창고가 있었다.

1930년 12월 남조선철도회사의 광주∼여수선이 개통되고, 가와사키 기선회사가 경영하는 여수∼시모노세키 간 항로가 영업을 시작하면서 여수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인구 및 화물의 집산이 급증하고, 각종 상공업에 대한 투자도 늘었다.

1934년 여수항의 무역총액은 1572만3344원으로, 이 중 수출이 1170만4310원, 수입이 401만9034원이었다.

한편 여수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관련 한국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주로 간척사업에 매달렸다. 그 대표적인 일본회사가 바로 일본 사가현 출신으로 구성된 합명회사 다카세(高瀨)였다. 이 회사는 1921년 지금의 충무·서교·광무동 일대 공유수면 16만1984㎡를 매립한 데 이어 1922년 화양면 백초리와 소라면을 잇는 간척지 250정보, 1923년 봉산면 일대, 1925년에는 소라면과 삼일면을 잇는 500정보 등을 간척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 후반 밭 1000정보, 택지 9만9174㎡, 건물 3만3058㎡, 간척지 816정보, 항만 매립지 3만3058㎡를 소유하게 된다. 당시 이 농장에는 3000여 명의 소작인들이 일했고, 여기서 생산된 면화와 쌀은 여수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네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성장세를 기반으로 여수면은 1923년 지정면(자체 사업 등이 가능한 면)으로 승격했고, 이후 국립수산진흥원 여수출장소, 여수어업조합 등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화태리에서는 처음으로 김 양식에 성공한 것은 1924년의 일이다.

1929년 여수군의 군세일반을 보면 수산업에 종사한 호수가 일본인 546호, 한국인 6605호였다. 즉, 1호를 4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약 2000여 명이 어민 또는 그 가족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시기 총독부 통계연보의 인구와 대조해보면 일본인 대부분이 수산업종사자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수적으로 한국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일본인 어업자들은 여수에서 얻는 어업 소득은 전체의 절반 이상을 ‘독식’했다. 1928년 총 어획고 443만8362원에서 일본인이 238만8941원, 한국인이 204만9421원을 차지했다. 제조·양식을 포함하면 일본인이 356만9313원, 한국인이 304만1630원의 소득을 올렸다.

/윤현석기자 chadol@kwangju.co.kr·윤희철

▲도움말 주신 분

노경수 광주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이봉수 동강대 건축과 교수

▲이 기사는 국가기록원·광주시·전라남도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출처:광주일보홈페이지에서 펌.


  추천하기   목록보기   글쓰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296  전문커리어교육 프로모션    이재인 2021/04/13 1 16
1295  *심리상담 및 전문과정교육*    이재인 2021/03/25 6 39
1294  초대! 『방법으로서의 경계』 저자 산드로 메자드라, 브렛 닐슨 전 지구 인터넷 화상강연 (2021년 3월 20일 토 오후 6시)    갈무리 2021/03/16 8 59
1293  새 책! 『객체들의 민주주의』 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03/01 20 105
1292  여수지역사회연구소 ^^    김현도 2013/04/07 589 4801
1291  승승장구했던 여수의 근현대사 장면들 (1부)군사기지서 식민어촌 전락 … 일본인 이주 늘며 도시화    관재수 2013/01/23 368 3524
 승승장구했던 여수의 근현대사 장면들 (2부)국제항 열리며 인구·화물·자본 집중 … ‘여수 전성시대’    관재수 2013/01/23 383 3335
1289  승승장구했던 여수의 근현대사 장면들(3부)철도·항구 개통되며 신시가지 조성 … 외지인들 ‘북적’    관재수 2013/01/23 385 3344
1288  여수에 조속히 외국기업전용산업단지를 빨리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관재수 2013/01/23 602 4603
1287  시민협)2월 23일(토) 문화관광답사 용기공원,선소,예울마루,장도    여수시민협 2013/01/23 586 4462
1286  만약, 박람회장 전부를 아예 무역항으로 활용해버렸으면 속이 시원할텐가?    관재수 2013/01/21 623 5124
1285  그래도 수산청 여수유치 투쟁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관재수 2013/01/21 454 3369
1284  제언)여수도 세종처럼 특별자치시나 특별지정시가 될수 있는 이유들이 얼마든지 있다.    관재수 2013/01/06 367 3279
1283  제안)여수-하동간 철도와 여천역도 역세권개발에 포함되어야 한다.    관재수 2012/12/13 564 4644
1282  2012 겨울학기 개강    생태예술학교 2012/11/27 615 4559
1281  시민협)11월 28일(수) 85회 토론회, 문수동 아파트 조성 어떻게 볼 것인가    여수시민협 2012/11/22 425 2958
1280  2012 하반기 무료 미술심리상담을 실시합니다!    생태예술학교 2012/11/07 478 3452
1279  제3회 한국구술사네트워크 워크숍 “구술사와 전시(展示)"d\ 안내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 2012/10/13 654 5143
1278  시민협)10월 5일(금) 84회 시민토론회, 여수산단 안전사고 진단과 과제    여수시민협 2012/10/04 377 2721
1277  이글통해 여수엑스포 사후활용마저 비뚤어지면 더 비참해질것이다.    관재수 2012/10/03 656 5116

    목록보기   다음페이지     글쓰기 1 [2][3][4][5][6][7][8][9][10]..[65]   [다음 10개]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
Home 정회원 및 후원회원
가입안내 여수커뮤니티 여론조사
바로가기 고용보험사무조합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