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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산성 - 석창성
 운영자    | 2006·09·03 10:47 | HIT : 3,224

석창성(石倉城) 
석창성은 백제 시대 원촌현과 통일신라 시대 해읍현 이래 이 고장의 치소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여수(麗水)라 이름을 바꾸고, 현종 9년(1018)에 순천 도호부에 영속시켰다. 충정왕 2년(1350) 다시 현령을 두었으나, 현령 오흔인이 이성계의 역성 혁명에 불복함으로써 조선 태조 5년(1396) 순천부로 편입시켰다.
성종 10년(1497) 내례포(여수시 국동으로 추정)에 좌수영을 설치하면서 16세기부터 석보창(창고)으로 기능이 변한 것 같다.

석창성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데,「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여수 석보는 둘레가 1,479척이고, 높이는 10척 이내이며 3개의 우물이 있다」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석보란 여지지에 기술되어 있는 바 석성이며 여수 석보란 순천부 동쪽 60(혹은62)리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과거의 여수현으로서 현재의 석창성이다. 따라서 성곽이 세종 때는 목책이었는데, 성종때는 석성이었다는 것으로서, 현재의 석성은 세종∼성종 사이에 쌓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자북 기준으로 약 10°정도 기울어져 남쪽을 향하고 있다. 모양은 거의 바른 네모꼴로서 모를 약간 굴린 정도이다. 동문쪽 성벽은 민가가 자리잡고 있어 성곽의 파괴가 심하며 동북쪽 모퉁이와 서남쪽 모퉁이 성곽 상부에도 민가가 위치해 있다. 성곽의 지세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갖는 평지에 자리하므로 성안도 대체로 동족이 높고 특히 중앙이 약간 높도록 계획되었으며, 성곽을 쌓는 방법은 낙안읍성과 비슷하다. 기초는 진흙을 한겹 깔고 잡석을 한켜다지는 방식으로 쌓아올린 토축으로 보이며, 성굽은 큰 돌을 길이 쌓기로 한겹 빙 둘렀다. 이 위에 성돌을 약간 디밀어서 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성벽을 길이 쌓기로 하지 않고 큰돌을 쓰는 대신 면쌓기로 한 것은 백제계 수법이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내탁(內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서남쪽 모퉁이 주택하단의 굽두리 돌과 성곽을 따라 발과의 경계선에 놓아진 자연석 석축은 성곽이 협축은 아니지만 내탁은 경사를 줘서 비탈로만 처리하지 않고 드문드문 적당히 자연석 석축을 만들어 뛰어 올라갈수 있도록 고려한 것이라 추정된다. 성문 앞에 쓰여졌던 옹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치만 1개소(추정)가 남문지 옆에 남아 있다. 치를 설치했다면 1개소만 만들었을 리가 없을텐데 다른 곳에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성문은 동문과 서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서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 해자(垓字)
    해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축성 기법으로 보아(특히 평지 성곽의 경우) 해자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서도 해자의 유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해자가 뚜렷이 남은 곳은 성 북쪽과 남쪽이며, 특히 북쪽의 경우 완벽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데 폭은 대략 10∼15m 사이이며 남아 있는 깊이는 대략 1m 내외이다. 성굽의 수평 높이가 일정치 않고 서쪽으로 완만하나마 경사진 것으로 미루어 흐르는 물을 끌어다 해자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남쪽의 해자는 폭이 7∼8m 정도의 폭을 유지하는데 성굽이 물에 곧바로 닪지 않고 호안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2. 건물지
    건물은 1871년에 기록된 호좌수영지에 의하면 여수면(呂水面)에 사창(社倉) 3칸과 봉상청 2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석물
    성 밖 동남쪽 모서리 개울에서 디딤돌로 사용되는 치석(治石)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듬은 모습으로 보아 탑이나 건물 기단의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탑의 부재(部材)일 가능성이 많으며 건축 연대도 12세기 이전 것으로 추정되어 12세기 이전의 사찰지가 묻혀 있던가 건물지가 매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4. 비석
    추정 동문지 안에는 비석 2기가 서있는데 하나는 지붕이 없다. 이것은 원래 성밖 여수로 들어가는 구(舊)도로 곁에 있었던 것인데(세차장 자리) 보호가 어려워 1985년 옮겨 놓은 것이다. 비문에 "節度使 李公寅熙 永世不忘碑(절도사 이공인희 영세불망비)", "節度使 金公魯甲 恤民善政碑(절도사 김공로갑 휼민선정비)"라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훼손이 많이 되었다.
  5. 토기류
    초석이 발견되었던 성곽 중앙의 밭과 동남쪽 모서리 밭에는 많은 자리 파편과 기와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들은 대부분(지방가마) 백자 파편으로 조선 말기의 것들이나 여러 점의 고대 토기(연질, 경질 토기)와 자기편들이 발견되었다. 멀리는 삼국시대 적갈색, 청회석 토기의 파편과 회색 토기로부터 13∼14세기 경 무문청자 및 상감청자와 15세기로 추정되는 분청사기, 16세기 인화문 분청사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현령이 있었던 시기, 별장을 두었던 시기, 18세기 이후 사창과 시장으로 운영되된 시기와 일치하며 그릇의 고급 정도는 자리한 행정 기관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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