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 답사 자료
 운영자    | 2008·08·07 11:30 | HIT : 6,835
1. 사건 전개 일지
  
  ■ 1946년  1월 12일 :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 해산
                      - 국방경비대, 조선해안경비대 창설
  ■ 1946년  2월 15일 : 4연대 모병 시작
  ■ 1948년  1월 10일 : 4연대 편성 완료
  ■ 1948년  2월 7일 : 미 군정은 남로당을 불법 단체로 선포하고 검거, 전향, 테러 등 시작                       - 이에 따라 남로당은 비합법 태세와 중앙집권식 하향 조직 체계 구축  
  ■ 1948년  4월  3일 : 제주 4․3 사건 발생
  ■ 1948년  5월  4일 : 14연대 창설 (4연대 1개 대대 병력)
  ■ 1948년  5월 10일 :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 1948년  7월 17일 :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
  ■ 1948년  8월 11일 : 대한민국에 대한 정권 이양 및 미국 점령군의 철수에 관한 한미간의 협정 성립
  ■ 194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거행
  ■ 1948년  9월   5일 :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
  ■ 1948년  9월 15일 : 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
  ■ 1948년 10월  2일 : 개정 국회법 공포
  ■ 1948년 10월 13일 : 민족주의 성향 국회의원들 ‘미군 철수’라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 1948년 10월 13일 :  시가전 예행연습
  ■ 1948년 10월 15일 : 우체국을 통한 일반전보로 제주도 파병 관련 명령 하달
  ■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 지창수 상사 휘하의 병사들이 연대 병기고와 탄약고를 접수함.
  ■ 1948년 10월 19일 저녁 9시경 : 비상나팔을 불어 출동준비를 하고 있던 제1대대 병력을 재빨리 소집함. - 제1대대에 대한 무장이 끝나자 나머지 2개 대대를 소집하여, 약 2,5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남로당원임을 밝힌 김지회 중위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됨.
  
   1948년 10월 20일 여수 상황
  
  ■ 1948년 10월 20일 새벽 1시 20분경 : 여수읍내로 진입하기 시작한 14연대 봉기군은 무기고를 접수하고 접수한 무기를 좌익단체에게 지급, 각 관공서 및 중요기관을 점거함.
  ■ 1948년 10월 20일 새벽 6시경 : 14연대 봉기군 여수시내 장악함.
  ■ 1948년 10월 20일 오전 10시경 : 보안서 및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조직에 의해 경찰, 우익인사, 우익청년단, 지주 색출작업에 들어감. 그리고 14연대 봉기군들은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명의로 성명서를 내걸음 - ‘제주도 출동 절대 반대’,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 등
  ■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 인민대회가 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여 진행됨 -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시작하여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복동 등 5명이 의장이 되어 대회를 진행,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 최후의 결전가를 부르고 대회를 끝냄.  
    
   1948년 10월 20일 순천 상황

  ■ 1948년 10월 20일 아침 7시경 : 14연대 봉기군 중 약 700명은 여수역에서 6량의 통근 열차로, 1,300여명은 각종 차량을 이용하여 순천으로 향함. 당시 순천에는 경찰과 더불어 순천 경비 임무를 맡은 제14연대 2개 중대(지휘 홍순석 중위)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제4연대 1개 중대 병력이 20일 새벽 광주로부터 파견돼 순천을 방어하고 있었음.
  ■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30분경 : 여수에서 출발한 14연대 봉기군들이 순천에 도착하자 홍순석 중위 휘하 2개 중대가 14연대 봉기군 대열에 합세, 동천변을 사이에 두고 14연대 봉기군을 방어하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14연대 봉기군에 합류.
  ■ 1948년 10월 20일 12시경 : 14연대 봉기군 순천시내 완전 포위 - 순천 시내를 지키던 500여명의 경찰은 14연대 봉기군에 밀리면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 됨.
  ■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 경찰병력의 패퇴로 14연대 봉기군 순천 점령.
     좌익학생, 노동자들에게 무기가 지급되고 경찰, 우익요원, 기독교도 등을 적발․처분하기 시작함. 순천을 완전히 점령한 14연대 봉기군들은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약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일부는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광양․하동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시켜 나감.

   전남 동부지역 전역으로의 확산

  ■ 1948년 10월 20일 저녁과 21일 사이
   * 남원 - 14연대의 도착과 더불어 폭동이 일어남. 그러나 제3연대와 충돌 조우
   * 구례 - 경찰지서는 구례 좌익세력에 의해 14연대 도착 전에 점령당함.
   * 보성 - 지방 좌익세력들이 경찰서를 공격, 경찰 및 우익인사들은 피신하였고 14연대 봉기군은 무혈입성함. 그러나 4연대와 15연대의 공격을 받기 시작함.
  ■ 1948년 10월 21일
   * 14연대 봉기군들은 집집마다 그리고 시내를 달리는 차에도 인공기를 달게 함.
   * 여수경찰서장 고인수를 비롯한 사찰계 직원 10여명 처형.
    그러나 총무과장 정홍수, 수사과장 정주용 등은 양심적인 경찰로 분류, 석방.
   * 한편 육군 총사령부는 봉기군 토벌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동 사령부를 21일 오후 광주에 파견.  
  ■ 1948년 10월 22일
   * 반역자 적발과 숙청이 계속됨. 여수군청을 비롯한 각 행정기관을 접수한 인민위원회는 과장급 이상을 모두 파면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정상적인 업무를 계속 집무케 함.
  ■ 1948년 10월 23일
   * 순천 진압
   * 여수, 순천지구에 계엄 선포
   * 오전 : 부산에서 파견된 해군부대와 국방경비대 병력 일부가 육․해군 합동으로 여수 상륙을 시도. 그러나 14연대 봉기군들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좌절됨.
   * 오후 : 대판통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에서는 수백명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인민재판이 열림. 이때 천일 고무공장 사장 김영준, 대한노총 여수지구위원장 박귀환, 사찰계 형사 박찬길, 박기남, 경찰서 후원회장 연창희, 한민당 간부 차활언 등 주요 우익인사가 사형됨.
  ■ 1948년 10월 24일
   * 순천 방면으로부터 진압군의 공격이 시작됐으나, 14연대 봉기군들에게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함. 14연대 봉기군 쪽에서는 탄약을 운반하던 여성 동맹원 정기덕이 사망하고 기타 사상자도 많았음.
  ■ 1948년 10월 25일
   * 오후 1시경 : 보안서 앞 광장에서 정기덕의 인민장이 진행됨.
  ■ 1948년 10월 26일 ~ 27일 상황
   * 26일부터 27일까지 : 진압군의 무차별 포사격 개시
   * 26일 : 14연대 봉기군들 광양, 구례 방면으로 대부분 퇴각
   * 27일 오후 2시경 : 여수 완전 진압. 이때 여수 시내는 극소수의 좌익청년과 학생들이 남아 있었음.
  ■ 1948년 11월 20일 : 국회, 국가보안법 통과  ■ 1948년 12월  1일 : 국가보안법 발효

    2. 여순사건의 개요
1948년 10월 19일 저녁,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가 제주도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사건을 일으켰다. 제14연대 하사관 그룹은 제주도로 파병을 반대하여 정부수립 2개월의 이승만 정권을 당혹케 하였다. 14연대 하사관들이 주도한 사건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곧이어 전남 동부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나 진압군이 즉각 투입되어 순천은 23일, 여수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14연대 봉기군과 남조선노동당 등의 지방좌익 세력 등은 부근의 산악지대인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미군은 14연대 군인봉기를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군은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군사 장비를 지원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을 '지휘'했다. 그 덕분에 여순탈환작전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국회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우려와 강력한 반대를 뿌리치고 여순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한편 군대와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군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는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이후 장기군사독재 정권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여순사건을 철저하게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주민통제체제를 하나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유숙계(留宿屆)제도를 실시했고, 좌익들을 선도하고 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保導聯盟)을 조직했다. 이와 같이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라는 인식을 널리 퍼뜨려 학살의 기초를 마련했다.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아무런 재판도 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이나 해안 절벽, 산기슭에서 죽어갔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60년 동안이나 만여명이나 되는 주검들이 야산에 유기되어 방치되어 왔다.
여순사건은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4연대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에는 우익 인사와 경찰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고, 진압작전 때에는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협력자를 지목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나서면 다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싹은 잘려져 버리고 말았다.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국가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여순사건과 이후의 한국전쟁은 남한사회가 반공국가로 작동하는 원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3. 여순사건 여수 유적지
▪14연대 주둔지

  1948년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육군 제14연대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원래 봉양, 물구미, 신근정이란 3곳의 마을이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 해군이 가막만과 구봉산 뒷산의 지형을 천연 요새로 삼아 해군 수상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지역민을 동원 근로보국대라 하고 비행장을 건설하는 중 완공 직전에 일본의 패망으로 빈 막사와 격납고만 남아있던 곳을 미군정이 인수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4일 국방경비대는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14연대를 창설하여 초대 연대장에 이영순 소령이 부임하였다. 이어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이던 1948년 10월 19일 제주출병 명령에 지창수 상사 등이 거부하여 회식 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 철수하고 1952년 12월 31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15육군병원이 설치되었으며, 1962년 6월 26일부터 1976년 2월 20일까지는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지정되었다.
  1976년 7월 23일부터 현재까지 한국화약공장이 입주하여 가동 중인데, 옛부터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후 일본과 미군에 이어 한국군의 병영지로 쓰이다가 급기야는 시민의 안전을 볼모로 하는 화약공장이 들어서기까지 민족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간직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애국국민에게 호소함>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게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 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
                

▪부역자 심사와 서국민학교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 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강제집결지로는 서국민학교 외에도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진남관 및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모이게 하였다.
  우익과 경찰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동조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따로 분류되었다. 이를 일명 손가락총이라 부르는데, 일부는 학교 뒤의 구덩이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하였다. 손가락총 분류 대상자는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27일, 전 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음에도 시민들은 흐르는 눈물에 발만 동동 구르며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왜적의 침입에도 나라를 구하며 지켜내고 일제 36년도 당당히 견뎌내었던 여수시민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모두가 죄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틀을 이렇게 학교 운동장에서 보낸 시민들 중 일부는 즉결 처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교도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학살되기도 하였다.  

<부역자 심사>
1. 진압군이 순천, 여수를 점령한 다음 맨 처음 한 것은 협력자(부역자)색출
2. 시내로 압축해 들어온 진압군은 집안에 있으면 반란군으로 여겨 무조건 쏴 버린다고 경고
3.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취급
4. 모든 시민을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경찰우익청년단원이 혐의자를 손가락으로 지목
5. 진압군은 먼저 사건 가담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이 붙잡히면 학교 건물 뒷편 등에 마련된 즉결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으로 타살하거나 곧바로 총살
6. 나머지 사람들은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져 심문과 재판을 받음.

<심사 방법>
1. 교전중인 자
2. 총을 가지고 있는 자
3.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4. 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5.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6. 머리를 짧게 깍은 자
⇒ 심사는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 등의 기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음


▪중앙동 인민대회장소

  봉기군과 지방좌익은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인민대회 장소에서 '38선이 무너졌다.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 동포가 동포를 죽일 수 없다'고 선전한 뒤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시작하여 이용기의 사회로 봉기군대표와 지방좌익의 축사에 이어 아래와 같은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1.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3.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4.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5.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6.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또한 인민대회에서는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목윤 등 5명이 의장이 되어 대회를 진행하였고, 대회를 끝낸 오후 5시경부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후 21일 여수시의 각 읍면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민대회가 열렸는데, 여수가 진압되고 부역자를 색출하면서 인민대회장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압송되어 현장에서 즉결처형으로 죽어갔다.


▪김종원과 종산국민학교

  중앙초등학교는 1917년 진남관에서 시작한 여수수산학교(현 여수대학교)가 1944년 11월 국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처음 학교로 사용했던 곳이다. 해방이 되면서 1940년 설립되었던 봉산동의 서국민학교 부설 구봉간이학교가 校舍가 비좁고 부족하여 잠시 진남관을 학교로 사용해 오다가 1946년 9월 1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학교 명칭을 종산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경찰과 전남경찰 및 여수경찰서 특수대가 국방경비대 군인들과 함께 이 학교에 주둔하였다. 10월 28일부터는 소위 가담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수와 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 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2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특히, 부산의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재판없이 즉결처분을 자행하였는데, 권총이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 만행을 자행하여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은 여순사건 이후에도 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하였고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등의 만행을 일삼다 1960년 병으로 사망했다.
  아무런 재판과정도 없이 학살되어 암매장되거나 만성리, 민드래미 골짜기, 호명과 봉계동 등지에서 학살된 사람 모두가 이 학교에 수용되었던 혐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까지 그 규모와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이 60년이 흘렀다. 이 학교의 현재의 이름인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 후인 1951년 9월 1일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애기섬 학살지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으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으로 불렸다. 49년 말까지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30만명에 달했으며, 결성목적은 좌익세력을 통제,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활동목표는 대한민국 정부의 절대 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 반대와 타도,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등의 강령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은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활동을 하였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초기, 서울을 제외한 전국, 특히 이천, 안성, 평택 이남 지역에서는 정부·경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 검속 및 집단총살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의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여수를 비롯한 시외곽 지역인 율촌, 소라, 삼일, 쌍봉의 보도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 수장하였으며 남면, 화정면, 삼산면의 섬 지역은 주변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 후 수장하였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

▪신항과 함포사격

  이곳 신항지역은 여순사건 발발 4일후인 1948년 10월 22일,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쳤던 김종원 대위가 부산의 5연대 1대대를 이끌고 해군 LST(상륙함)에 승선하여, 10월 23일 아침 9시 40분경에 여수 상륙을 시도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당시 전투사령부는 통신수단이 미비하고 수륙양륙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상륙을 시도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대개 한국군 지휘관은 즉각 상륙을 주장했고, 미군 고문관은 상륙 보류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종원의 독단으로 박격포 사격 및 상륙작전은 시작되었고, 박격포 사격의 부정확성과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오후에는 공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상륙작전은 실패하였고, 해군 LST로 다시 후퇴하였다.  
  최후의 본격적인 여수탈환작전은 사방을 포위한 섬멸압박작전으로 10월 26일 정오경에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곳 신항지역은 이때까지도 봉기군의 저항이 치열하여 LST에 승선한 5연대 1대대는 아직 상륙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조급해진 5연대는 81MM 박격포 2문을 갑판 위에 설치해 놓고 사격을 시작하면서 상륙을 재시도했으나, 갑판의 반동으로 탄착점이 형성되지 않아 여수 시가지에 화재가 발생하여 시가지를 더욱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압군측의 사상자까지 나게 되었다. 결국 제5연대는 진압이 완료된 후 무혈상륙을 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김종원은 그에 대한  분풀이로 종산국민학교에서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민간인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만성리 학살지

  만성리 학살지는 부역혐의자로 잡혀있던 종산국민학교 수용자 중 수백여 명의 민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집단학살한 곳이다. 1948년 11월 초순경부터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여순사건 부역혐의자들 일부를 이곳에서 학살하고 협곡과 같은 골짜기 속으로 던져 넣은 후 흙, 모래와 돌로 암매장하였다. 여수를 진압한 진압군은 경찰과 함께 종산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공포의 부역자 색출을 진행하였다. 사건 당시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록을 보면 1948년 11월 13~14일 양일간 고등군법회의가 열려 재판 회부자 458명 중 사형언도자가 102명이나 되었는데, 이곳에서의 희생자가 그때의 사형언도자 들이었는지는 공개된 기록이 없어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이후에도 종산국민학교에서 포승줄에 끌려온 사람들을 이 골짜기에서 계속 학살하여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였다 한다. 그래서 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 오천 주민들은 공포의 땅이 된 이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다니기까지 했다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사건이 지난 후 이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작은 돌을 계곡에 던져 넣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속이 한동안 오래 지속되어 돌탑무덤이 솟아오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만성리 형제묘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 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인 곳이다.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
  여순사건의 부역혐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 졌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 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모두 125명이 매장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실태조사 때 증언하였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을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잡혀있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생사가 궁금하던 많은 가족들이 학살지와 가까운 산위에 숨어서 불타는 시신을 바라보았지만 서슬 퍼런 군인들이 지키는 현장을 애끓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35   여순사건에 대한 다크투어리즘 적용 방안 16·12·15 2236
34   진실화해위원회 광주목포순천전주군산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4820
33   진실화해위원회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희생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4129
32   진실화해위원회 전남동부지역 민간인 희생사건(2) 조사보고서 11·08·02 3418
31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 희생사건(1) 조사보고서 11·08·02 1392
30   진실화해위원회 광양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1160
29   진실화해위원회 전남국민보도연맹사건(1) 조사보고서 11·08·02 1247
28   진실화해위원회 보성 고흥지역 여순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1152
27   진실화해위원회 구례지역 여순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1190
26   진실화해위원회 순천지역 여순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1290
25   진실화해위원회 여수지역 여순사건 조사보고서 11·08·02 1591
24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 11·03·15 1824
  여순사건 답사 자료 08·08·07 6835
22   해방후 빨치산 무장투쟁 역사 06·09·03 5854
21   지역운동과 여순사건 1 06·09·03 5313
20   지리산과 민중의 역사 06·09·03 3571
19   조례제정권과 여순사건 조례(안)에 대하여 06·09·03 2421
18   제주4.3특별법과 과거청산 06·09·03 2414
17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수사건 06·09·03 2729
16   여순항쟁 06·09·03 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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