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에 새 왕조를 세우고 등극한 태조 이성계는 조선 초의 제도를 고려의 문물제도 그대로 계승 답습하였다. 그 후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중앙관제와 지방행정제도에 이르기까지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조선국가의 건국으로 여수지방의 사태는 악화되었다. 여수현과 돌산현이 폐지되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의 일이었다. 조선국가가 본격적으로 군현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일으로 현령 오흔인이 태조 이성계의 건국 반포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여수현과 인군의 향 부곡은 순천부의 면이 되었다. 여수현은 여수면이 되고 인근의 향 부곡도 각각 면으로 개편되었다. 소라포부곡은 소라포면, 율촌부곡은 율촌면이 되었으며 삼일포향은 삼일포면으로 개칭되었고, 여기에 소멸된 진례부곡과 적량부곡이 흡수되었다. 또한 돌산은 여수면에 흡수되었으며 인근 여러 섬은 순천을 비롯하여 낙안 광양 흥양 등에 분속되었다. 여수지방이 일시에 폐현되었다가 결국 다시 현이 설치되지 못한 것은 조선국가의 지방제도의 정비 및 해안방어체제 상의 수군제도 때문이었다.

여수, 여천은 행정구획상으로 순천도호부 관할이었다. 그러나 군사상으로는 초기에 내례만호(처음은 진례만호)와 돌산만호가 지키는 수군기지로서 해방의 소임을 맡아왔다. 1479년 (성종 10) 내례만호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되고 이어서 돌산에 1523년(중종 18) 방답첨사진이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전라좌수영과 방답첨사진이 폐영될 때까지 전라좌도수군의 주진 구실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이 고장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행정적으로 순천도호부에 속했지만 군사적으로는 해방의 요충으로 진례, 내례 및 돌산포만호진, 전라좌수영과 방답첨사진으로 이어지는 500년간 남해를 지키는 수군기지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임진왜란과 여수

여수지방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독자적 행정구역이 되지 못하였지만 해양 연안 방위의 수군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왜란이 일어나자 여수지방은 역사상 빛나는 위업을 남겼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을 기하여 일본의 대군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일본군 앞에서 조선국가의 군대는 무력하였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이미 여수지방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는 본영과 휘하 각 진의 전선을 동원하여 경상도 남해안으로 진출하였고, 연전연승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전직관료 유생층 무과출신 등이 대거 참가하였다. 이들은 직접 해상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또한 해안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무과출신으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한 사람으로는 황득중, 정대수, 정철, 정린, 정춘 등이 있다.

승려도 의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른바 의승수군이 그것이다. 흥국사가 그들의 중심 무대였고 전라좌수영 관내 여러 고을 사찰의 승려 400여명이 의승수군으로 편성되었다.
 


진남관전경


진남관


선소굴강


선소


장군성


대첩비


충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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