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사건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 영국이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보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세계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영국은 이제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은 여러 면에서 위협적인 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한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 이외에도 거문도를 내항한 외국 선박이 상당수에 이른다. 러시아의 푸챠친 제독은 1854년과 1857년에 세 차례나 거문도에 기항하였다. 1854년 4월 푸챠친은 조선인과 만난 최초의 러시아인이었으며, 그가 김류에게 전달한 공문은 러시아 최초의 외교문서로 추정된다. 푸챠친은 러시아 황제의 특사로서 수교를 원하는 외교문서를 조선 정부에 전달해줄 것을 원했지만,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군함도 온 적이 있었다.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벨제독은 와츄셋호 함장 슈펠트 중령에게 거문도의 군사적 이점을 파악하라고 지시하였다. 슈펠트는 1867년 1월 거문도에 기항하여 닷새 동안 정밀하게 탐사를 벌인 결과 해군기지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조선에 관심을 표명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거문도를 탐사하였다. 그만큼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을 전격 점령하자, 그에 맞서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할 것을 결의하였다. 중국 주둔함대사령관 도웰 제독은 아가멤논호를 비롯한 3척의 군함에 600여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4월 15일자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중국으로부터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보받은 조선 정부는 외아문 협판 묄렌도르프와 유사당상 엄세영을 중국의 정여창이 지휘하는 군함 양위호에 편승시켜 영국의 무단점령을 항의하기 위해 거문도에 파견하였다. 회담 결과가 여의치 않자, 조선 정부는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영국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공함을 보내기도 하였다. 러시아가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 않자 영국은 사건을 일으킨 23개월 만에 철수하였다. 당시 영국은 2년 동안의 요새화 작업에 주민들을 일당제로 동원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에게 식료품이나 헌옷가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한편,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하자 조선 정부는 1887년에 거문진을 설치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1895년 폐지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영국의 거문도사건은 국내외적인 이슈였으나 정작 거문도 주민들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였다.

       


거문도뱃노래


거문도영국군묘지

   

동학농민운동과 여수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쳤던 좌수영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전개되던 시기 전라좌수사가 일본 군함에 농민군 진압을 요청하였던 불행한 과거를 지니기도 한 곳이다. 전라좌수사 이봉호는 농민군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으나 곧바로 바뀌어 그 후임으로 김철규가 부임하였다. 전봉준은 김철규를 무사히 여수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만 그는 도착한 직후, 농민군으로부터 좌수영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순천을 출발한 농민군은 종고산을 점령하여 좌수영을 위협하였고 이에 맞서 좌수사 김철규는 성안에 있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켰다. 농민군을 공격에 앞서 좌수영에 “형제끼리 싸우는 것은 집안이 망할 일이니 우리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함하여 이류(일본군)을 막자”고 호소했지만 성안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농민군의 공격이 강화되자 김철규는 음력 11월 25일(12.21) 여수 앞 바다에 정박중인 일본 해군 쓰쿠바호의 함장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대한 침략 기회만을 엿보던 일본군 쓰쿠바(築波)함장 흑강대도(黑岡帶刀)는 육전대 1백여 명과 좌수영 군대와 합류, 곧바로 농민군 진압에 나섬으로써 여수, 순천지역에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을 주도하던 동학 농민 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동학 농민 운동이 끝나고 일본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실시한 갑오개혁 때 각 군영을 합쳐 군무아문 소속으로 일원화하고 수군을 완전히 폐지함으로써 1895년(고종 32) 7월 15일 전라좌수영은 폐영되었다.

여수의 3.1운동

경술국치 후 가혹한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하에서 일제는 조선을 일본국토로 파악하고 장악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하였던 방침으로 1914년에는 여수군과 돌산군이 통합하였다. 이 때 돌산군의 금산면 봉래면은 고흥군으로, 태인면은 광양군으로 들어갔다. 두남 화개 옥정 삼산 금오면이 여수군에 편입된 것이다. 결국 돌산군이 없어지고 오늘의 여수시의 영역이 확정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궐기하였다. 여수지방에서도 4월 1일을 기하여 율촌 쌍봉 소라 등의 여러 면에서 마을단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야간을 이용하여 해안의 여러 섬에서는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일부 어선에서는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어선을 향하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어서 빨리 너희 나라로 가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그해 9월에는 여수에 청년회가 결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3.1만세운동을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후 12월에는 여수 간이수산학교 학생등이 또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지만 모두 사전에 발각되어 실제 계획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한편 여천군 화양면 출신의 윤형숙 의사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광주의 수피아여고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녀는 3월 10일 광주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던 날 군중의 맨 앞에서 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군도로 그녀의 왼팔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윤형숙 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계속 불렀다. 윤형숙 의사의 기개는 시위 군중들에게 영향을 미쳐 광주의 만세시위가 맹렬하게 진행되었고, 광주의 만세시위는 그 뒤 호남 전역으로 확산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하의 사회운동과 여수

여수지방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상의 이익과 상부상조를 위하여 노동단체를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노동자는 농산물과 원료의 가공 및 집산에 필요한 운수 운반 부문과 토목건축 부문에 종사하였다. 구체적으로 항만부두노동자, 지게꾼, 짐꾼, 정비노동자 등과 토목건축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기술 숙련 노동이 아니라 단순 자유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민족독립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결을 통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여수지방에도 여러 명칭을 가진 노동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동친목회, 삼일면노동공제회, 여수노동조합 등이 있었다.

여수지방의 청년들도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발맞춰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경 여수에서 김백평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이 서로 돕자는 의미의 '맞돕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야학을 중심으로 생활개선과 사회제도의 개혁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여수 학생들은 1929년 11월 3일을 기하여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과 뜻을 같이 하여 당국의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1930년 1월 여수공립보통학교에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한 격문이 살포되었고, 일본 경찰은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을 여수의 시위와 격문을 살포했다는 혐의로 검거하였다. 1930년 1월 28일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은 징계 학생의 조속한 복교와 구속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동맹휴학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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