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지창수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라는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하였다.

이 봉기는 남로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남로당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봉기를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이 정해진 바가 없었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에 진입하였다. 순천에는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범한 대중봉기로 발전하였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배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세력 등을 처단함으로써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일을 도왔다.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남한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맞는 정치적 위기였다. 하지만 여순봉기는 전남동부 지역에만 머물렀고 전국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며칠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에 놓여 있거나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났다.

정부는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군사고문단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선엽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도 흔들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도 제정되기 전에 실시된 계엄령은 반란지역의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할 수 있게 만든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하였다.

 해방 전후의 한국현대사는 서로 체제가 다른 분단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된 까닭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여순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이승만정부와 언론 기관 그리고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 등은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내의 쿠데타’라던가, 남로당 중앙이나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경찰·우익인사 학살뿐만 아니라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유혈적 결과의 책임은 봉기세력과 지방좌익세력들의 책임으로만 떠넘겨 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좌익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평가는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역사적 사실 규명이 미흡한 채 편향적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통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향이 큰 사건일수록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구 작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그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미리 재단하고 일방적인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포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여순사건에 대해 가졌던 위기감과 대응방식이 이후 강력한 반공노선 아래에서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으로 닥친 위기를 진압작전으로 극복한 뒤 반공사회 구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반공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여순사건은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고 현재까지도 여순사건에 지식과 이미지는 당시에 형성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좌익세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좌익세력은 짐승이나 악마의 수준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진압작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 우익 청년단체원들은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애국자로 칭송되었고 작전이 끝난 다음에는 훈장이 수여되었다. 반공이 애국이며 반공 이외의 것은 체제위협이자 매국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래는 학살관련사진입니다.(주의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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