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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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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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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과 망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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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4-03-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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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남관(鎭南館) / 망해루(望海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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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 324 호
소 재 지 : 여수시 군자동 472
규    모 : 정면 15칸(53.6m), 측면 5칸(12m), 240평, 단층 팔작 지붕
시    대 : 조선 후기
지정 연월일 : 1959년 5월 30일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위치한 보물 324호의 진남관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전라 좌수영성의 유일한 건축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이충무공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진해루(鎭海樓) 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客舍)이다. 남쪽을 진무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이라고 하였는데,『난중 일기』에는 진해루에서 공무를 보았다 하고, 이와 별도로 객사도 기록으로 나타나 진남관 터는 원래 객사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이후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171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지었고, 이후 크고 작은 수리를 거쳤으나, 1718년 중창이 오늘날 건물의 뼈대가 되었다.
  순종 5년(1911)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53년 진남관 보수 공사 도중 1718년 이제면 수사가 쓴 현판이 발견되었다.
  현 건물은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이 240평의 대형 건물로 해인사 장경판고와 함께 몇 안 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린 겹처마 단층 건물이며, 장방형 대지에 2열 바른층 쌓기 하고 기단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돌리고 큰 막돌 덤벙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형 기둥(68개)을 세웠다.
  기둥은 창방으로 연결되고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 양식으로 기둥 위에 주두가 놓이고 포 사이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은 주심포나 익공계 집에서 주로 사용된다. 외 2출목으로 짜여진 공포는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고, 내부는 2열 고주(高柱)를 배열하여 대량(大樑)을 받도록 하였다. 또 기둥과 보를 보아지로 보강하였으며 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우고 그 위에 종보를 두어 화반대공을 결구하였다. 전후 퇴칸에 퇴보를 두어 지붕의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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